Pastor's Colum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 안에서 거하지 않으면 은혜가 금방 사라집니다. 주님 안이 우리 삶의 바운더리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주님 안에 거하도록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거할 때는 늘 은혜가 충만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늘 주 안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환난이나 고난을 경험해도 능히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 은혜를 누리를 방법은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1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큰 바위 및 안전한 그 곳으로 내 영혼을 숨기시네

<후렴>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2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내 모든 짐 벗기시네 죄악에서 날 끌어 올리시며 또 나에게 힘 주시네

3 측량 못할 은혜로 채우시며 늘 성령의 감화 주사 큰 기쁨 중 주님을 찬양토록 내 믿음을 도우시네

4 주 예수님 공중에 임하실 때 나 일어나 맞이하리 그 구원의 은총을 노래하리 저 천군과 천사 함께

이번 주 암송구절: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But God demonstrates His own love for us in this: While we were still sinners, Christ died for us.

이번 주 읽을 말씀: 여호수아 Joshua 1-12, 요한복음 John 19-24, 시편 Psalms 56-60

(매일 성경을 네 장씩 읽으면 1년 일독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생명의 삶 말씀(QT): 출애굽기 2:11-25 왕궁에서 미디안 광야로

모세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생 즉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태어난 모세가 오히려 핍박자의 손에서 왕자로서 양육되는 과정은 구속사를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보게 됩니다. 모세는 바로 공주의 아들로 40년은 궁중에서 왕의 아들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은 모세를 왕국에서 저 미디안 광야로 내몰아 가십니다. 이것은 모세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며 그의 삶을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모세의 마음이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그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히브리 사람들을 보자 그들을 `자기 형제들`이라고 인식했습니다. 모세에게 자기 형제들은 애굽 왕가의 형제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노예로서 학대받는 히브리 백성들을 자기 형제로 인식하게 되었을까요? 본문 11절은 그것을 한마디로 `모세가 장성한 후에`라고 표현했습니다. `장성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이를 히브리서 11:24,25절은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 했습니다.   

모세가 장성했을 때, 그는 자신이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아니라 히브리인임을 알았습니다. 더구나 그 히브리인들은 바로의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를 두고 오래도록 고민을 하다가 바로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고난받는 히브리인과 함께 살아가고자 결단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마음에 히브리인들에 대한 동정의 마음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젖을 뗀 후에 애굽의 교육을 받고 왕이 되기 위해서 훈련을 받고 자란 모세인데 어떻게 그에게 이렇게 히브리인에게 동정의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의 마음 속에 히브리인들에 대한 동정심을 주지 않으면 그들의 처지를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왕의 아들로 휼륭한 교육을 받았고 이제 40의 나이가 되었지만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다듬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혈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칼을 빼서 휘둘러야 할 때와 칼집에 넣어서 보관해야 할 때를 잘 몰랐습니다.

어느 날 모세는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때 모세는 그만 참지를 못하고,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이유는 단순히 히브리 사람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7:25에 보면,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세가 의도를 가지고 애굽 사람을 쳐죽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 의도는 자신을 구원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모세는 스스로 구원자라 생각했고, 고난받는 동족들이 그런 자신을 지지해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오히려 동족들은 그런 모세를 배척했습니다. 이튿날 이번에는 두 히브리인들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를 보고, 또 참지 못해 그 잘못한 사람에게 왜 동포를 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을 시인하기는 커녕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하며 모세에게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또 “네가 애굽 사람을 쳐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고 대들었습니다.   

모세는 이 말을 듣고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자신이 한 일이 전부 탄로가 났습니다. 바로는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려고 찾았습니다. 이 때문에 모세는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피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바로에게 쫓겨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그는 하루 아침에 왕자의 신분에서 쫓기는 도망자 신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삶을 간섭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미디안 제사장에게 일곱 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양떼를 치고 있었는데 하루는 양떼에게 줄 물을 길어 구유에 채우고자 했는데, 다른 목자들이 와서 연약한 자매들을 내쫓았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모세가 일어나 목자들을 내쫓고, 자매들을 도와 양떼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다른 목자들이 연약한 자매들을 괴롭힌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자주 물을 길어 양떼들에게 먹이는 것에 차질을 빚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세의 도움으로 너무나 쉽게 먹이고 오자, 이를 잘 알지 못한 아버지 르우엘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너희가 오늘은 어찌하여 이같이 속히 돌아오느냐?”

르우엘의 딸들은 한 애굽 사람의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고, 아버지는 그를 버려두고 온 것에 책망한 후 데려와서 음식으로 섬기도록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모세는 르우엘 집안에서 동거하게 되었습니다. 갈 곳 없었던 모세도 이를 기뻐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모세는 십보라와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했습니다. 게르솜이란 이름의 뜻은 `내가 거기서 나그네가 되었다`입니다. 이는 당시 처량한 모세의 신세, 또 모세의 불행과 고통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아들 이름을 게르솜 곧 나그네라고 붙이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당시 모세의 억울한 마음, 슬픈 마음이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영접을 받았습니다. 가정도 이루었고, 아들까지 얻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근본은 나그네였습니다. 그에게 만족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나그네 설움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세는 너무나 잘 나가는 화려한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모든 자가 부러워하는 자리였습니다. 사람들은 모세가 지나갈 때만 해도 모세를 연호하며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의 양을 치는 처량한 목자요, 나그네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곳에는 더 이상 사람들의 함성도, 칭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화려했던 생활도 한자락의 추억으로만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모세는 어디에도 마음을 붙일 수 없는 나그네였습니다. 모세 스스로 자신을 나그네라고 생각했습니다. 나그네는 정처없이 떠도는 존재입니다. 외로움과 허전함, 쓸쓸함, 막막함이 그 마음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런 나그네의 자리로 인도하셨을까요?

그것은 애굽에서 나그네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해,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인도하셨고, 그 광야에서 양치는 훈련을 통해 목자의 마음을 배우게 했습니다. 또한 나그네 설움을 깊이 체험케 하심으로, 나그네된 동족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목자가 되도록 훈련했습니다. 이 기간이 1,2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40년간이나 지속됩니다. 완전히 애굽의 왕자로서의 물을 빼고, 나그네요 목자로서 바닥까지 낮추는 훈련을 한 것입니다.

이때 모세가 집중적으로 받은 훈련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먼저는 겸손훈련입니다. 겸손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예전에 모세가 한창 혈기왕성할 때는 자신이 구원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만 힘을 쓰면 동족들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40년 양치는 훈련을 통해 이제는 자신에 대해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는 바닥까지 낮아지고 또 낮아졌습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서 온전히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붙드는 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예수님을 닮은 겸손의 종이 되었습니다.   

또 모세는 광야 나그네 훈련을 통해 인간적인 혈기와 야심을 전부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는 것입니다(민12:3). 이는 지도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가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이라는 의미가 길들여지다는 의미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의 목자로서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모세는 광야 나그네 훈련을 통해 하나님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으로 채우면 우리는 자신의 것들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가진 애굽의 왕자로서의 자랑, 소유, 타이틀, 능력, 머리 등을 모두 가져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자들은 반드시 광야 훈련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 한 사람도 예외없이 다 광야 훈련을 치러야 합니다. 이런 광야 훈련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을 닮은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광야 훈련을 통과해야 하는데 통과하지 못하면 신앙이 이기적인 성형이 너무나 강해집니다. 자신 밖에 모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이해심이나 배려하는 마음이 거의 부족합니다.

광야 훈련을 통해서 자신이 부서져야 합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배워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이기심, 욕심, 정욕, 교만 등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고 이런 것들이 산산히 부숴져 깨어져야 합니다. 23절은 이제 하나님께서 모세를 미디안에서 부르시는 이유를 말씀해줍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습니다. 이는 40년의 세월이 지난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긴 세월동안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지도자로서 혹독하게 연단되고 준비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자손들의 형편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그들은 고된 노동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24,25절.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이 말씀에는 우선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짧은 2개의 절에 4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이전까지는 거의 하나님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이 등장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4개의 동사 “들으시고, 기억하사, 돌보셨고, 기억하셨더라” 가 중요합니다. 이는 그동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까맣게 잊으시고 방관하시다가, 이제야 돌아보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이제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에서 이끌어 내실 때가 무르익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 소리를 다 듣고 계셨습니다.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한시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서도, 혹독한 노역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몸은 괴롭지만 계속 자손이 불어났습니다. 이 모든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기억하셨습니다. 마지막 “기억하셨다”는 본래 뜻은 “아셨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고통을 아시고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큰 일을 행하고, 기적을 베푸는 것,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열 재앙으로 애굽을 치고, 홍해를 가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지도자요, 목자를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80이 다 된 소망없이 늙어 죽으려는 한 사람을 부르시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오랫동안 모세 한 사람을 광야에서 준비시키셨습니다. 모세의 존재는 바로 이 때를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극적인 반전에 반전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애굽의 나일 강에서 빠져 죽을 운명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에서 미디안 광야로 쫓기는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도망자로서 영접을 받았지만 미디안 광야에서 처량하고 고독한 나그네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생애는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가장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를 창조하게 됩니다. 이전까지의 삶은 사실 이 때를 위해서 준비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모세처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정말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가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런 드라마틱한 정도는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끄시고 훈련하시는 과정 중에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영적인 아기로서 보호되는 과정에 있는 분도 있을 것이고, 인간적인 혈기과 감정과 자기 죄로 인해 고통받는 분도 있을 것이고, 광야에서 나그네 훈련을 받는 듯한 아픔의 시간을 지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데서 기억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세 한 사람의 생애를 주관하시고 섬세히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생도 섬세히 섭리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가 한 시대를 감당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각자에게 알맞은 훈련을 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극적인 반전을 믿고 가야 합니다. 설혹 현실이 어렵고 불만족이라 하더라도, 내 삶을 날마다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께 감사함을 가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이루시는 인생 후반전은 훨씬 더 아름답고 풍요로운 인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모세는 하루 아침에 애굽의 왕자에서 미디안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삶은 거칠고 힘든 과정이었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한 인생을 다루시는 과정임을 믿기에 주님을 의지합니다.

우리가 광야를 지나갈 때 하나님을 진실로 만나게 하옵소서. 우리 자아가 부서지게 하시고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를 겸손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정욕과 욕심, 세상을 추구하는 마음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시고 이런 연단을 통해서 정금같은 예수의 제자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한주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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