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or's Colum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주의 시작은 월요일이 아닙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주일이 한 주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주일에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주를 기쁨과 믿음으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주일에 받은 은혜로 한 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아보십시오. 한 주간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살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4:30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With great power the apostles continued to testify the resurrection of the Lord Jesus. And God’s grace was so powerfully at work in them all.

 

찬송가 52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https://www.youtube.com/watch?v=PCIpVZCQ4QY

1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후렴>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2 간절히 오라고 부르실 때에 우리는 지체하랴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받고 못들은 체 하려나

3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 쾌락이 끝이 나고 사랑의 그늘이 너와 내 앞에 둘리며 가리우네

4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두신 영원한 집이 있어 죄 많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영접해 주시겠네

 

이번 주 암송구절: 사도행전 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Then Peter said, “Silver or gold I do not have, but what I have I give you.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walk.”

 이번 주 읽을 말씀: 출애굽기 Exodus 1-18, 마태복음 Matthew 24-28, 시편 Psalms 21-24

(매일 성경을 네 장씩 읽으면 1년 일독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 마태복음 9:1-13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

지금까지 마태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도 쫓아내시고 광풍도 잠잠케 하시는 기적들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내가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면에 깊이 감추어진 죄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변화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죄를 사해 주셨는지 함께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1절을 보면 예수님이 배를 타고 다시 본 동네로 가셨습니다. 이 동네는 가버나움 지역입니다. 

이때 어떤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2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중풍병은 뇌혈관이 터져서 사지를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병입니다. 사람에게 뇌가 너무 중요한데 이 사람은 뇌가 손상되어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모든 소망을 끊고 자포자기하기 쉽습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 나가기만 하면 나음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도 동일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중요한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안심하라.”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실까요? 당시 사람들은 병을 죄의 결과로 생각했습니다.

이 병자도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았을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 몹쓸 병에 걸려 이렇게 산단 말인가? 왜 하필 나인가?’

그는 주님께 믿음으로 나왔으면서도 죄의식 때문에 풀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절망의 상처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불안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죄의식과 불안을 없애주십니다. “안심하라.”

둘째는,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치료받으러 온 그에게 왜 “죄들이 이미 용서되었다.”라는 말을 하실까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이 병이 난 것은 죄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론적인 렌즈로 보면 병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는 병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죄를 지음으로써 병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인류의 가장 절박한 문제는 죄의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목적도 그 백성을 그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1:21).

코로나 시대가 길어지자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가 절박하다고 말합니다. 맞지요. 살아가기가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절박한 경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죄 용서입니다. 사람이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경제의 풍요로움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참된 행복은 죄 용서로부터 시작하고, 죄 용서로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죄 용서를 먼저 선언하신 겁니다.

이때 주위에 있던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3).

왜냐하면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했다고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 그들을 침묵시킵니다.

6절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님은 세상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죄 용서와 함께 병 고침까지 받았습니다.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능력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본질 문제인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죄를 용서하십니다. 우리를 치유하십니다. 시편 103편 3절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찬양합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시 103:3).

우리는 주님이 누구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곳을 떠나가시다가 9절에서 세리 마태를 보고 제자를 삼았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당시 세리는 가장 악질적 인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로마 제국주의에 빌붙어서 유대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착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대 사람은 세리와는 친구를 맺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나를 따르라” 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저히 제자가 될 수 없는 그런 사람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사람 취급도 안 했는데 예수님은 제자로 부르십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세상의 부적격자로 낙인을 찍어버리지만 주님은 그런 세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도록 부르십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한 사람의 생애를 완전 바꾸어 놓았습니다.

세리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즉각 순종했습니다.

주님의 소망이 그 삶에서 성취되는 길은 순종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소망이 아무리 커도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소망은 순종을 통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마태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서 친구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엽니다. 이 잔치는 마치 천국 잔치를 연상케 합니다. 마태는 구원받아야 할 친구들을 초청해서 주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잔치는 구원의 잔치요 전도의 잔치였습니다.

마태와 죄인들, 그리고 예수님이 함께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즐거운 ‘밥상 공동체’를 즐깁니다(10). 그러나 바리새인은 그것을 보고 시비를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밥을 먹기 때문입니다.

이 때 주님은 12절에서 그 당시에 통용하던 속담을 인용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제아무리 신통한 의사일지라도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필요합니다. 의사는 병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병만 치료하면 얼마든지 건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의사는 환자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어찌하든지 그 병을 치료해서 건강한 사람으로 회복시켜 주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한번 죄인은 영원한 죄인으로 낙인찍어 버렸습니다. 자신들도 몰래 죄를 지으면서 겉으로는 의로운 체 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위선으로 이중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13절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은 호세아 6: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만 드리면서 겉만 의로운 체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긍휼을 원하십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죄인들을 향한 불붙는 사랑. 이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잘못된 길로 갈지라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많을수록 더 안타까운 마음, 긍휼의 심령이 더 불붙듯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불타는 긍휼의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 긍휼을 십자가에서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이로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희생할 수 있습니까? 

사랑은 나타내는 것이지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향한 긍휼이 불붙는 듯하여서 율법을 초월해 버리셨습니다. 율법의 파괴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입니다. 죄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죄를 사랑으로 녹여 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긍휼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로, 나 같은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내가 나를 생각하면 문제가 좀 있기는 해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나도 내 실력이나 집안 배경만으로는 천국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나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이 예수님은 내 삶의 마디마디에서 긍휼을 베푸십니다. 내가 영적으로 철이 없었을 때에는 내 능력만으로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영적으로 철이 들면 들수록 주님의 긍휼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나의 하루하루의 삶은 오직 주님의 긍휼 때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이 예수님은 나로 하여금 세상을 향해서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일은 긍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나를 통해서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교회를 통해서 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긍휼을 덧입는 사람들의 모임이며 세상을 향해서 긍휼을 실천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교회로 부르셨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주님의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예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한주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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