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or's Colum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0년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코로나 이전에 깨닫지 못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 포기해야 할 것과 포기해서는 안될 것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포기한 만큼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을 굳게 가지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불필요한 것, 중요하지 않는 것들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더욱 커지고 견고해질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 우리의 믿음이 더욱 단순해지고 견고해져서 주님을 위해서 한 마음 한 뜻으로 달려가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380장 나의 생명 되신 주

https://www.youtube.com/watch?v=3tISsG-IGv4

1 나의 생명 되신 주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의 흘린 보혈로 정케하사 받아주소서

<후렴> 날마다 날마다 주를 찬송하겠네 주의 사랑 줄로써 나를 굳게 잡아 매소서(아멘)

2 괴론 세상 지낼 때 나를 인도하여 주소서 주를 믿고 나가면 나의 길을 잃지 않겠네

3 세상 살아 갈 때에 주를 더욱 사랑합니다 밝고 빛난 천국에 나의 영혼 들어가겠네


오늘의 말씀: 베드로전서 2:11-25 하나님의 부르심의 합당한 삶

어제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묵상해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느 시대를 살든지 외적인 문제나 상황을 유심히 보는 것보다 주님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먼저 아는 것이 시대를 이길 수 있는 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임을 늘 자각하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을 위해서 과감하게 버릴 것은 버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첫째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크리스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신자들이 경건하게 살 때 거룩의 향기가 풍깁니다. 정욕에 사로잡혀서 억제하지 못하고 사는 문란한 삶은 악취를 풍깁니다.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죄악된 욕망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또 오늘날 육체의 정욕을 자극하는 매체들이 홍수처럼 쏟아집니다. 아무 생각없이 살다가는 죄의 홍수에 떠밀려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만 합니다. ‘제어한다’는 말은 ‘멀리하다’ ‘피하다’ ‘끊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의지적으로 죄악된 요소를 피하고 미워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을 때 그 자리를 피해서 도망가듯이 죄를 피해야 합니다. 육체의 정욕은 우리 영혼을 병들이고 부패하게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파괴시키고 영성을 갉아 먹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을 적극적으로 제어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5절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죄성을 가졌기 때문에 결단과 의지만으로 육체의 정욕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내면에서 나오는 정욕을 제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시간을 보내기 시작하면 우리의 어두운 마음이 성결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변화되어 집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우리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고 말씀을 힘써 사랑하고 기도에 힘쓸 때 영적인 향기를 풍기게 됩니다. 

둘째로선한 행실을 갖기에 힘써야 합니다. 

12절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당시에 사람들은 신자들이 악행한다고 비방했습니다. 신자들이 숨어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은밀한 처소에서 남녀가 음행한다고 비방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식을 오해해서 어린아이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고 비난했습니다. 이처럼 오해하고 핍박하는 자들에게 일일이 해명하기 어렵습니다. 말로 설명하기보다 행실을 선하게 가져서 비방하는 자들의 입을 막고 감동을 시키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다른 면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술자리에 가지 않고, 세상적인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비난을 받습니다. 이들에게 말로 해명하기보다 선한 행실로서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1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보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선한 행실, 착한 행실을 보고 주님께 나아옵니다.

비록 지금은 크리스천들을 비난하는 자들일지라도 우리가 사람들의 험담과 비난을 넘어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어려운 형제 자매들을 돕는 크리스천의 아름다운 일들을 하게 될 때 그들은 감동되어 주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13-15절을 보면 크리스천들의 생각과 행실이 무엇에 바탕을 두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우리 신자들은 세상의 제도와 법질서를 잘 지켜야 합니다. ‘주를 위하여’ 순종하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세상 지도자들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시민임과 동시에 세상 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이중 시민권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도 순종하지만 세상의 법질서도 잘 지켜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법도 철저하게 지키며 선한 행동을 하게 될 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감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참아야 합니다. 

18,19절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당시 교회에는 신분도 낮고 경제적으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면 모두가 평등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환들은 주인들에게 함부로 대했습니다. 잘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사환들이 주인을 두려워함으로 순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질서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보면 교회에서 워낙 은혜로 대해주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도 함부로 하고 행동도 함부로 합니다. 이것은 덕이 되지 않습니다. 윗사람들을 공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범사에 순종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9절에 보면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참으라고 말합니다. 왜 까다로운 사람에게 순종해야 하는가? 부당하게 짐을 지우는 자까지 참고 인내해야만 하는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20-21절에서 예수님을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섬기고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칭송만 받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배척과 고난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종교지도자들에게 시기를 받아 체포 당하시고, 빌라도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도 없으시고 거짓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침 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당한 고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했습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예수님은 엄청난 고난을 당하셨지만 맞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에게 부당하게 체포당하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없는 줄로 아느냐(마26:53)” 예수님은 얼마든지 천군천사들을 대동하셔서 부당하게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24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친히 그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자기 죄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한 대속의 고난이었습니다. 

이사야 53:5,6절은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이 만약에 고난을 당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상처, 죄의식, 미움, 시기질투, 증오심, 정욕과 비교의식, 열등감 등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병든 내면이 치료되지 않습니다. 일생 죄의 짐을 지고 고통하며 사탄의 종노릇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죄 값이 다 치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우리가 양과 같이 길을 잃었었는데 영혼의 목자요, 감독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알의 썩는 밀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고 새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무력한 것이 아닙니다.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 고난당하심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을 구원한 대속의 고난. 얼마나 숭고합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21절을 보면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본을 받고 몸소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제 우리도 예수님의 본을 받아 그 자취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까다롭게, 때로는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지라도 참고 인내하면 언젠가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어려울 때 주님의 고난을 보고 깊이 묵상하고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십시오. 주님을 믿는 백성들은 주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육체의 정욕을 제거하고 선한 행동을 하며 비록 억울한 고난을 받을지라도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감당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한주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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