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tor's Column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6세기 이후, 근대 선교로 들어서면서 윌리엄 케리를 중심으로 해변선교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마젤란, 바스코 다가마, 콜롬버스 같은 사람들이 항해의 길을 열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세상적인 시작에서 문명사를 보면 무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 항해의 길을 열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해변 선교가 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내륙에서도 기차가 발달하고 교통이 발달하여 허드슨 테일러를 중심으로 내력선교, 중국내륙선교, 아프리카 내륙선교, 남미 내륙선교의 길이 열렸습니다. 현대에 들어와서 비행기가 발달하고 문물이 원활하게 교류될 수 있는 교통이 발달한 이유는 미전도 종족들에게 선교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서 플렛포옴 형태의 소셜 네트워크가 더욱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믿지 않는 형제 자매들에게 복음을 나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때는 한 영혼을 주님께 올려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냥 시간을 허비하는 수단이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복음편지를 보내고 낙심한 형제 자매에게 영적으로 힘을 돋우는 메시지를 보내고 하나님의 교회의 회복을 위한 기도를 나누는 영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이런 기회에 한 영혼을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도록 힘을 모읍시다.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https://www.youtube.com/watch?v=HxPy-Vk3GPc

1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후렴>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2 이 눈이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이미 얻은 증거대로 늘 믿으며 이 맘에 의심없이 살아갈 때에 우리 소원 주 안에서 이루리

3 주님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 주 하나님 아버지는 참 미쁘다 그 귀한 모든 약속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무슨 일이 있을까


오늘의 말씀: 로마서 4:18-25 참 믿음

로마서 4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의로음’입니다. 의롭다는 단어는 그 당시에 법정에서 사용된 단어였습니다. ‘사면’과 ‘무죄석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무죄석방이 될 수 있습니까? 죄가 발견되어 법정에 섰는데 재판장이 죄가 없다고 무죄석방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죄인이 어떻게 무죄석방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죄인의 죄를 죄가 없으신 독생자 예수께 전가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죄인들에게 전가되었습니다.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죄가 가려지고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죄인들에게 크레딧에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인간이 가지고 있던 죄가 옮겨져서 하나님의 처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죄의 형벌을 받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 임한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는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들에게 임해서 죄인들은 죄에서 석방되고 법정을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재판관은 죄로 죽어야 할 죄인들에게 ‘너는 의롭게 되었다’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의롭게 된 것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마땅히 자신의 죄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아야 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자들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세상이라고 해도, 심지어는 직장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 그리고 심각한 분열을 보이고 있는 시대를 살아간다고 해도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시대에도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이유는 인간의 본성이 죄로 인해서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자신의 몸과 사라의 나이를 생각해볼 때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상황에 있었지만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참된 믿음의 성격을 증거합니다.

믿음에는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믿음의 대상, 믿음의 내용, 믿음의 동의와 확신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의 후손을 주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하시면 그의 약속은 성취된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바랄 수 없는 중에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라는 말은 직역하면 ‘소망을 거슬러 소망 중에 against all hope, Abraham in hope’인데, 그것은 역설적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적 소망은 없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붙들었던 것입니다. 소망을 거슬러 소망 중에! 이것이 참 믿음의 성격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과 하나님께 대한 긍정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무엇이 있을 때 혹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을 섬기다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될 때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에 자기 자신을 신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더딜 때 그의 믿음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보지 않고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의심이 아니라 더욱 견고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기다렸을 때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 아브람의 믿음이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성취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제기될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탄생하기 2000년전의 인물이었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을수 있었느냐는 거죠. 이 의문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확실하게 증거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바라 보았던 예수님의 때(나의 때)는 예수님께서 이땅에 성육신하여 오시기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시므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때를 바라보고 믿으므로 즐거워하고 기뻐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것을 바라고 믿음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것 바로 이것이 굿뉴스 복음 아닙니까? 즉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 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너무나 고달프고 힘들어서 즐거워하고 기뻐할 일이 없다고 생각될 때 아브라함이 바라보고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목 하십시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황 불못 지옥 형벌의 심판으로 부터 우리를 건져내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무죄 선고를 받고 다시 살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요. 즐거워하고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 입니다. 이 시간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자들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은총을 내려 주시기를 간구 합니다.  로마서 4장 24절과 25절에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용어가 있습니다.  로마서 4:24-25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어떤 용어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 입니다. ‘우리도 위함이니’ ‘우리 주를’ ‘우리가 범죄한것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에서 ‘우리’가 네번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우리’는 개인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어야 된다는 의미 입니다. 찰스 스펄젼 목사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고백하기 전에는 결코  ‘우리 주’라고 말할수 없습니다.”  3년동안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훈련 받았던 제자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확인하고는 위대한 고백을 한것을 기억 하실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고백 했습니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 했습니다. 그 고백을 하기전까지 도마는 비록 3년간 예수님의 제자로서 생활을 했지만 예수님을 우리 주 우리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도마가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연결은 없었다는 이야기 입니다.  혹시 오랜 교회 생활을 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 주 우리 하나님으로는 알고 있는데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자리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기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일이 남의 일처럼 들립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시기 2000년전에 존재했던 아브라함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인 복음을 바라고 믿으며 즐거워하고 기뻐하였다는 사실을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아브라함이 바라고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이미 2000년전에 이루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장차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바라보고 믿었다면 우리는 2000년전에 이미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되돌아보며 믿을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하심에 개인적으로 연결이 되게 해 주셔서 모두다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감격적인 고백을 나눌수 있게 되기를 소원 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한주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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